대선(大選)을 앞두고 대학교수들이 더 바쁘다.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요즘은 익숙한 단어가 됐지만 ‘폴리페서’(현실정치 참여하려 출마나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교수)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폴리페서들의 강의에 대한 무책임, 정체성의 혼재 등 많은 지적이 있었기에 본 필자의 글도 그중 하나로 묻힐 테지만 올해 강단의 들썩거림이 어느 때보다 더 유난스러워 볼쌍 싸납기 그지없다.

조선 정치사에서 우뚝 선 인물 퇴계 이황의 처신은 작금의 폴리페서들에게 작은 메시지가 될 듯싶다. 퇴계 이황은 벼슬에 앉히면 물러나고, 얼마동안을 하다가 다시 물러나 임금이 다시 부르기를 79번이나 했다. 이런 퇴계의 평소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 하나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 가면 연못 옆 사립문에 ‘유정문(幽貞門)’이란 목판이 걸려 있다. 선생께서 가다오다 자신의 생활 지침으로 삼고자 옆에 두고 아끼던 문구다.

여기서 ‘유(幽)’는 ‘은둔’을 가리킨다. ‘정(貞)’은 그럼에도 관계와 책임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자신과의 경계’가 담겨 있다는 게 한국학 교수의 설명이다. “은둔하면서도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건사하며 제자를 키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선생의 생활철학을 바로 느끼게 하는 충분한 증표다.

퇴계는 분명 정치보다 배우고 가르침을 좋아했음이 역력하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대학에서 보직은 피해 가며 그의 연구실의 불은 꺼질지 모르는 교수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가을이면 몇 권의 책을 사서 제자들에게 뚝 던져주곤 “올 가을은 이 책에게 고마움을 느껴봐…”라는 은유적 훈계와 함께 사라지는 고고한 선생의 뒷모습을 그리게 한다. 요즘 유행어로 딱 '교수 스타일'이다.

그러기에 다들 출세를 얘기할 때 퇴계는 '뒤로 물러나 있기'를 그토록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유성룡이나 주변 문도들이 "아직 그 분이 뜻을 펼 시절이 아니다"고 스승을 두둔했지만 퇴계가 남긴 저서들을 볼 때 공부하기를 정치보다 훨씬 좋아했고, 잘 맞았던 선비였음이 드러난다.

퇴계의 낙향 후 삶은 산책과 독서, 교육이 다였다. 그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선비 유학자들이 현실정치에 몰두할 때 퇴계는 자연을 벗 삼고 옛사람의 정신을 닮아 공부하고 교육하는 자신을 노래했다. '몸은 뒤로 물러나 내 분수에는 맞는데, 공부가 뒤처졌으니 이것이 걱정이다'는 글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퇴계는 자신이 정치에서 물러나 있음이 출세를 좇는 부나방들에게 작은 경종이 되기를 바랐다.

율곡과 서애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자 오랜 끝에 한 마디 했다. “실행하기 전에 이것이 정말 세상을 위한 최선의 일인가를 되새겨 보고, 무엇보다 일 벌리기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줬다. “권력은 책임이지, 영달이 아니다”는 글로 학자들의 올바른 자세를 늘 요구하고 경계를 시켰다.

율곡은 퇴계의 물러나 있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에 윤택함을 주지 못했지만, 물러나 후인들을 계몽했다.” 율곡의 평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후인들의 평가는 또 다르다. 한사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율곡의 정치는 희미해졌고 '아무도 모르는 산 속에서 홀로 향기를 피우는 난초가 되고 싶다'던 퇴계의 뒤로 물러남의 철학이 더 융숭한 평가를 받는 것은 뭔 연유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나섬’보다 ‘참음’이 더 힘든 세상의 이치라고 역설하는 건 아닐까 싶다.

대선이나 총선이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강단을 뛰쳐나온 대학교수들 행보가 적잖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봄의 가치, 참여보다 더 속 깊은 관심의 미학을 학생들에게 일러 줘야하는 퇴계 같은 교수 상(像)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화랑(畵廊)에 걸린 명화는 한발 뒤로 물러나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박병수 편집국장  -